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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논객] 화병(火病)에 걸린 대한민국

김형오박사 2017. 1. 3. 00:15

[시민논객] 화병(火病)에 걸린 대한민국
2016년 11월 05일 [옴부즈맨뉴스]
↑↑ 송내과의원 원장 송태호 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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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초반 여자 환자가 며칠째 잠을 못 잔다고 병원에 왔다. 혈압도 정상이고 진찰해 봐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수면제를 처방했다.

며칠 후 다시 온 그녀는 불면증은 물론이고 소화불량과 속 쓰림까지 생겼다며 우울해했다. 진료실에 마주 앉은 환자 얼굴에 병색이 가득했고 어쩌면 약간 정신이 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넌지시 "무슨 걱정거리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당장 두 눈에 눈물이 고인다. 친한 친구에게 돈을 빌려 주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며 갚지 않더니 급기야 연락이 끊어졌다며 땅이 꺼져라 하고 한숨을 쉬었다. 마침 대기 환자도 없었기에 그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어줬다.

돈을 빌려간 그이가 얼마나 친한 친구였는지, 남편도 모르는 그 돈을 저축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하더니, 이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잠도 못 자고 밥도 안 먹힌다고 했다. "의사 선생한테 별 이야기를 다 한다"며 겸연쩍어하는 그녀에게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권했다. 그녀는 정신과 진료는 싫다며 나에게 처방을 해달라고 했다.

화병(火病·Hwa Byung)은 우리나라에서 이름 붙인 병이다. 전 세계에서 이 병을 '화병'이라고 부른다. 고부 갈등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흔히 호소하는 병이기도 하다. 서양에서는 이 병을 문화 관련 증후군으로 취급한다. 상하가 뚜렷한 우리나라 같은 사회에서 이른바 '갑질'에 의해 생기기 때문이다. 가족관계뿐 아니라 사회관계에서 생긴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하고 묵혀두면 화병이 생긴다. 검찰 수사를 받던 사람이 나름의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택하는 경우를 화병의 극단적인 결과로 볼 수 있다.

화병은 소화불량, 불면증, 우울증, 피로, 공황 장애 같은 증상으로 나타난다.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나 싶더니 갑자기 깨어나 벌떡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찬물을 들이켜게 된다. 하루 종일 일을 했지만 뭘 했는지 모르겠고 멍한 상태로 지내다가 분했던 일이 생각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이 화병이다.

화병을 푸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확실한 자기편이다. 마음속 깊은 곳의 속내를 마음껏 털어놓아도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자기편이 있다면 화병 가능성은 줄어든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처럼 생긴 것을 알게 된 복두쟁이가 대나무밭에서 소리 지른 이야기는 화병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준다.

어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술로 풀려고 하지만 이건 화병을 악화시킬 뿐이다. 정신 건강의 이상이 신체적 이상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최순실 파문을 보는 우리나라 국민은 집단 화병에 걸릴 만하다. 물론 최씨 농단에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억울한 일을 당했다가 이번에야 그 까닭을 알게 된 사람들의 화병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최씨가 검찰에 구속됐다고 그 병이 나을 리 없다. 어쩌면 대통령도 화병 났을지 모른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말이다.

대통령의 화병 역시 자기편에게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때 비로소 나을 것이다. 혼자 끙끙 앓고 있으면 화병은 절대로 낫지 않는다. 온 국민을 내 편이라고 생각하고 시원하게 털어놓아야만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다. 자기가 저지른 일 때문에 화병 나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 오히려 속 편해 보인다는 게 문제다.

환자는 내게 한바탕 이야기를 털어놓은 뒤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복용하면서 점차 정상 생활을 되찾고 있다.
옴부즈맨 기자  ombudsman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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